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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간화선 서론

친절한 간화선 서론


신앙과 수행과 생활은 정립 되어야 한다. 즉 신앙을 떠난 수행, 수행이 없는 생활, 생활이 결여된 신앙은 정법(正法)이 아니다.


신심과 원력이 없는 수행은 공허하여 모양(相)만 키우게 되고, 수행이 없는 생활은 무명에 싸여 업(業)만 키우게 되며 현실적 삶에 바탕을 두지 않는 신앙은 맹신에 빠져 무지만 키우게 된다.


신앙과 수행과 생활은 셋이자 하나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신앙심이 바탕이 되지 못하고, 지금 여기의 현실적 삶에 뿌리를 두지 않는 참선 수행은 결국 메마른 건혜지(乾慧智)만 남게 되어 세상은커녕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게 된다.


신심과 원력에 바탕을 둔 화두수행으로 본래변목을 깨달아 무량한 중생에게 회향하여야 한다.



대숭불교는 근본불교의 정신으로 돌아가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는 “비지쌍운(悲智뾰遺)”으로 그 사상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 선종도 대승불교의 깨달음과 실천의 정신을 계승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요익중생(饒益衆生)”을 종지로 이론과 실천의 토대로 삼았다.


대혜스님이 창시한 간화선 역시 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요익중생의 길과 깨달음을 볍칙으로 삼는 견성성불의 길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간화행자들은 간화정신인 견성성불, 요익중생의 종지를 충실히 이행하여 자타겸제(나와남을 함께 제도함)의 선풍을 진작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간화선 역시 역사적이며 연기적 산물이기에 또한 이 시대에 맞는 간화정종(看話正宗)의 이론적 토대를 정립하여 시대 대중들로 하여금 쉽게 접근하여 화두참구를 통해 안심의 삶을 지향해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선의 전통에서 살펴보면 수행과 깨달음이 일치되는 “수오일여(修悟一如)”의 수중방편(修證方便)이 핵심사상으로 제기되었다. 이른바 “수오일여”란 수행과 깨달음의 일치, 즉 수행이 그대로 깨달음으로 발현되고 깨달음이 바로 수행으로 회향되는, 그래서 수행이 곧 깨달음이 되고 깨달음이 바로 수행이 되는 방편을 말하는 것이다.


수오일여의 입장에서 보면 수행자가 비록 구경의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 지만, 사실은 깨달음의 여부(與否)보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물음의 현전일념(現 前-念)을 통하여 깨어 있고 열려 있는 수행 그 자체로서 중생 회향이 이루어 지는 것이 더욱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모든 대승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중생본래성불(衆生本來成佛)의 교설에 의거하면 모든 중생은 이미 깨달아 있는 본각(本覺)의 입장에 서 있다. 물론 본각을 여윈 불각(不覺)의 입장인 중생에 있어서는 다시 수행을 통하여 본각에 합치되는 시각(始覺)이 요청됨은 불문가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더욱 중요한 것은 본래성불이라는 본각이 존재함으로 해서 밖을 향해 다시 깨달음을 만들거나 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마음이 부처(郞心是佛)라고 말하고, 사람이 부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성취와 무관하게 중생은 이미 깨달음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석가세존은 “이 세상을 구원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이미 구원되어 있음을 선포하러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그대로 불성의 존재임을 깨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부처로 살아가는 것이 선수행의 백미가 되는 것이다.


임제스님은 “언제 어디서나 주인으로 살게 되면(隨處作主), 지금 여기가 그대로 진실의 세계이다(立處皆眞)."라고 말했다.


주체적이고 진실되어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의 해탈을 살아가는 삶이 선수행이 지향하는 목적이다.


친절한 간화선 - 서론에서 발췌

월암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