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Making Ganhwa Seon Accessible to the General Public
수불스님 (안국선원 선원장) Ven. Zen Master Subul Snim
1. 참선(參禪)의 의의
참선(參禪)’은 반야지혜를 통해 내면의 무명을 밝힐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으로,단도직입으로 진리당처의 핵심 오의(奧義)를 곧 바로 드러내게 한다.선이 현실 속에 등장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리석은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선과 악으로 나누어진 이분법적인 사회윤리를 넘어서서 선과 악을 둘로 보지 않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참선 수행을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게 가로놓여진 정신적인 벽을 깨트리고 절대자유를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인도에서 싹튼 지혜로운 가르침이 대승불교로 승화되어, 다양한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어 왔다.특히 돈오(頓悟)를 체험케 하는 최상승 수행법인 조사선(祖師禪)과 묵조선(黙照禪)그리고 간화선(看話禪)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2.조사선과 간화선
중국의 선종(禪宗)은 인도의28대 조사이자 중국에서는 첫 번째 조사인 보리달마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조사선은 실질적으로 육조혜능(六祖惠能)선사가 제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조 선사는 모든 사람이 본래 지닌 자성(自性)을 직시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몰록 깨치는 돈오 견성(見性)을 천명하였다. 중국의 선종이 면면히 흐를 수 있었던 것은 육조께서 이러한 돈오선법을 온몸으로 펼쳐냈기 때문이다.
조사선이란 깨달음을 완성한 역대 조사들이 본래 갖춰져 있는 성품을 바로 눈앞에서 들어내 보여주신 법문(法門)이다.이 법문으로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자리에서 한 생각 돌이켜 스스로의 성품이 본래 부처임을 명확히 깨달으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재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일단의 일은 선지식, 즉 명안종사(明眼宗師)의 점검을 받아야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선어록에서 볼 수 있듯이 선종 특히 조사선 계통은 종사가 제자를 지도하는데 있어 지사문의(指事問義)와 기봉방할(機鋒棒喝)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 과제와 내용은 스승과 제자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정법의 안목을 체득케 하는 것이다.이러한 문답들이 어록으로 기록되고 전승되어, 송대에 이르러 본칙공안(정형화 된1천7백 공안)으로 완성됐다.
간화선은 남송대(南宋代)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묵조사선(黙照邪禪)의 무사안일한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빠진 당시의 상황을 개탄하고,여기에 대한 수행 방법으로 당대 (唐代)조사선 종장들의 법거량과 상대를 깨닫게 한 선문답을 정형화시킨 공안(公案)을 통하여 의심되어진 화두를 참구토록 하면서 형성되었다.
간화선은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깨달은 기연(機緣)과 상대방을 깨닫게 한 인연 등이 기록된 것을 근거로 해서 정해진 본칙공안 중 하나를 들어 철두철미하게 의심되어진 화두를 들게 함으로써 돈오하게 한 수행방법이다.
즉, 종사스님들이 법을 거량하거나 선문답을 해서 깨닫게 한 판례(判例)를 본칙공안이라 하고,이를 통해 의심이 돈발(頓發)한 것을 화두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지식께서 믿음을 낸 이에게 화두를 들게 하는 것,즉 참의심을 불러일으켜 깨닫도록 한 것이 간화선인 것이다.
따라서 조사선에서는공안 그 자체가 화두라고 할 수 있지만, 간화선에서는 ‘공안에서 비롯된 의심’이 화두인 것이다. 간화(看話)란 말 그대로 ‘화두를 참구한다(의심한다)’라는 뜻이다.
간화선에서 화두는 공 안과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공안이 단순하게 판례집에 기록된 선대의 선문답이라면, 화두는 특정한 공안이 개인의 내면에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자리를 잡은 경우를 말한다. 만약 공안을 실제로 자기 문제로 의심화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활구(活句)가 되지 못하고 단순하게 지나가 버리는 공허한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 에서 간화선은 두 가지의 요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 당대의 조사선에서 형성된 법거량이나 선문답이 공안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화두가 ‘들려고 하지 않아도 들려지고 내려놓으려 해도 내려놓을 수 없는’ 활구 의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간화선은 화두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온갖 역순경계(逆順境 界)에 끄달리지 않고 시절인연 따라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밝힐 수 있도록 한 최상승 수행 법이다.
간화선은 선지식을 의지해서 근원적 본래심을 깨닫도록 할 뿐만 아니라, 번뇌망 상과 역순경계까지 다스릴 수 있는 공부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3. 간화선 수행이란
1) 간화선수행을위한세가지기본요소[三要]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수행하도록 이끌어야 실제로 돈오를 체험케 할 것인가? 간화선은 어떤 원리와 실제에 의해 운용되는가? 깨달음으로 가는 장치는 어떻게 시설되는가? 소납은 지난 20여 년 동안 일만여 명의 대중들을 대상으로 간화선 수행을 지도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간화선이야말로 대중화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안국선원에서는 간화선 수행을 하러온 사람에게 화두를 들게 하기 전에, 먼저 초심자 법문을 들려준다. 참선수행을 하기 전에 종교를 믿어야 하는 이유와 수행의 필요성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지극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끝까 지 물러서지 않고 참선수행에 임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간화선 수행을 하려는 초심자에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선지식과 이 수행법에 대한 큰 믿음[大信心]이다. 수행자가 선지식에 대한 큰 믿음이 없다면 자기가 가진 선입견 과 알음알이로 인해 이후 화두 참구 중에 발생하는 각종 경계를 이겨낼 수 없다. 오직 결정된 믿음[決定信]만이 이 공부를 성취하게 해줄 수 있다.막상 수행을 시작하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방해가 극심하게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수행자는 자칫 이러다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옆 에서 지켜보는 선지식의 호법(護法)에 의지해야 비로소 온갖 난관을 뚫어낼 수가 있는 것 이다. 알고 보면 간화선 또한 조사선과 마찬가지로 선지식이 곧 길이다.
일단 간절한 믿음을 내어 선지식의 인도를 받아 참구를 하기 시작했을 때,참의심에 나 아간 수행자는 눈앞에 바로 은산철벽(銀山鐵壁), 즉 정신적인 벽이 앞을 꽉 막고 있음을 뼈 저리게 느껴야 된다. 이에 수행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물러서지 말고 이 벽을 뚫어야 되 고, 선지식을 끝까지 믿고 수행하는 이 과정은 결코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에 간화선이야 말로 최상승 수행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필요한 두 번째 요소는 이 벽을 꼭 뚫고야 말겠다는 대분심[大憤心]이다. 실제로 은산철벽에 부딪쳐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쉽게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애간장이 타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막막하고 갑갑하며 끝도 보이지 않아서, 울분이 솟아나고 오기도 발동한다. 그럴 때 선지식이 공부 길을 부추기면 꽉 막힌 기운이 천지 분간 못하고 치솟게 되는 법이다. 이 분심이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터져 나와야 용맹스런 추진력이 생겨 눈 앞의 철벽을 뚫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수행자는 천군만마 속에 단기필마로 쳐 들어간 장수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막상 천길 우물 속 같이 꽉 막힌 경우에 당해서 오로지 살아나갈 길만 찾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런 장치를 시설하여 그 속으로 밀어 넣은 선지식을 경우에 따라 미워하게 될 정도로 참기 힘든 지경이 된다. 이렇게 분심을 내어 생사를 벗어나려는 각오와 집중력으로 밀어붙여야 공부가 한층 더 순숙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필요한 요소는 활구 의심이 들려져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마땅히 본참 공안 상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된 다. 이렇게 의심되어진 화두를 들고 참구해야, 생사심(生死心)을 타파할 수 있다. 만일 진실로 의심이 성성(惺惺)하게 들려지면,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저절로 극복하게 된다. 한 번 돈발 되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의심이라야 참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공부를 하는 수행자는 사나운 개가 한 번 물면 결코 놓지 않는 것처럼 독종이 되어야 한 다.
초심자가 혼자서 참의심에 들어가 스스로 점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눈 밝은 선지식에게 의지해서 길 안내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간화선 수행을 하는데 꼭 필요한 신심, 분심, 의심을 간화선의 삼요(三要)라고 한다. 일단 이 세 가지 요소가 구비되면, 즉 신심과 분심이 충만한 상태에서 활구(活句)를 들고 의심하면, 그 의심은 단기간 내에 타파될 수밖에 없다.
중국 송말원초(宋末元初)에 살 았던 고봉원묘(高峰原妙)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을 이루려면 마치 천길 우물에 빠졌을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한낱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 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큰 망어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 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선요(禪要)》, 통광 역주, 불광출판사, p. 85)2)
2) 조사선에서 간화선으로의 전환
조사선 시대에는 선지식께서 선문답을 통해 제자를 지도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선지식 앞에 나아가서 묻는 사람치고 공연히 질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자는 불법(佛法)에 대해 비록 이론적 근거를 가졌어도 실제로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에 최선을 다해서 묻게 된다.
선지식은 의심을 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참문하러 온 수행자에게 계속해서 공부인연이 숙성되도록 단련시킨다.결정적인 순간 수행자가 온몸을 던져 간절히 물었을 때, 안목 있는 선지식은 시절인연을 살펴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기연(機緣)을 선보인다.
의심이 목에까지 꽉 차있던 수행자 는 바로 의심을 타파하고 언하변오(言下便悟)를 맛보거나 그렇지 못하면 설상가상(雪上加 霜)으로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더 큰 의심을 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지식이 수행자를 일대일로 제접하면서, 참선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담금질 하는 것이 조사선의 가풍인 것이다.그렇지만 이미 근본에 대한 의심이 걸려있는 상태에서 물어 들어오는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조사선 수행법은 스스로 의심에 들어갈 수 있는 근기와 시간적인 여유가 뒷 받침이 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러한 입장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렇다면 바쁜 현대인에게 짧은 시간에도 제대로 된 수행을 맛보게 하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도대체 어떤 수행방법으로 그런 것을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소납은 처음 가르쳤 을 때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 화두만 들고 마냥 앉아있게 하는 방법상의 한계를 스스로 맛 보게 된 뒤, 공안 상에서 의심되어진 화두를 들게 하는 간화선 수행을 통해 상대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핵심적 방법은 “단번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도록 활구화두를 들도록 해서,답만 찾도록 집중시키는데 있다” 하겠다. 수행자가 혼자서 화두를 들 때 활구 의심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답은 찾지 않고 문제만을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답을 찾는데 집중하다보면 몰람결에 활구의심이 활발발하게 살아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간화선은 조사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두 수행법 모두 그 근본 원리는 동일하다. 즉 수행자는 의심에 걸려야 하고,그것이 점점 커져서 온몸에 꽉 차면,시절 인연을 만나 타파되면서 돈오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 같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선지식이 공안을 통해 초심자에게 화두를 걸어주고 결국 타파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간화선 수행이 현실 속에서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3)간화선수행의핵심:활구의심
현재 안국선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간화선 수행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각자에게 손가락을 튕겨보라고 한 뒤에 문제를 제시한다.
“이렇게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손가락이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문제를 듣고 보았다면 문제에 따른 답만 찾으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문제를 따라 답을 알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면,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마음속에 걸리게 된 다. 무엇인지 모를 답답한 기운이 수행자의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기운이 왜 생겼겠는가? 마치 목마른 자가 물 찾다가, 물을 만나지 못하면 목만 더 마르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 현상이다. 답답하니 알려고 해야 하고, 알려고 하면 할수록 궁금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와 같이 되었을 때 계속해서 답을 찾고 찾으면서 끝까지 이 답답함을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들려진 활구 의심을 참구하라고 선지식은 수행자를 다그치게 되는 것이다.
공부 중에는 혼침이 가장 무섭기 때문에 앉아 있을 때는 눈을 뜨고 화두를 들고 졸리면 누워서 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려고만 하면 깨우는 기운이 있어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 면 더 이상 자려하지 말고 일어나 앉아서 최선을 다해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앉아 있을 때 5분 정도 눈을 감았다가 뜰 수는 있어도 그 이상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공부가 되는 것 같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 공부를 지어나가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산란심, 즉 번뇌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무시하고 내버려 두라고 말해준다. 번뇌 망상을 없애고 공부하려 하지 말고, 같이 동행하되 화두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문제와 더불어 의심되어진 그 갑갑함이 바로 활구의심인 것이다. 이렇게 잡들어진 화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지시킨다.지금 화두가 들려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준다. “알약을 먹으면 그대로 있나? 몸에 들어가면 녹아버린다. 약이 몸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 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화두 의심도 같은 이치다. 선지식이 문제를 던졌을 때 답을 모르니까, 그 문제가 온몸에 퍼져 의심화 된 것이다. 그러니 그 의심화 된 것을 계속 집중하고 추궁하라. 내면으로 돌이켜 자꾸 살펴서 한 덩어리가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참구할 때, 어떤 역순경계가 나타나더라도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럴수록 화 두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안국선원에서는 화두 참구하는 수행자를 향해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공부하라.” 혹은 “가시 달린 쇠채찍을 맞는 아픔을 느낄 정도로 뼈저리게 공부하라.”는 입장을 그대로 공 부 중에 수용할 수 있도록 수시로 독려한다. 그리고 또 수행자를 격발시키기를 “생사를 걸 고 은산철벽을 깨트리려는 수행자가 무슨 거문고 줄을 고르듯이 앉아 있을 여유가 있겠는 가? 처음부터 선지식을 의지해서 공부하는 수행자라면 거문고 줄이 끊어져도 좋다는 식 으로 참구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참고로 많은 수행자들이 따르고 있는‘거문고 줄 고르듯이 하라’는 것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팽이를 칠 때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때려서 최선을 다해서 정중동(靜中動)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일단 정중동이 된 뒤에는 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처럼, 거문고 줄 고르듯 이 하라는 말이다.(※ 화두를 들고 처음부터 거문고 줄 고르듯이 공부한다면 언제 크게 깨달을 수 있겠는 가. 咄)
이렇듯 간화 의지를 바르게 살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자세하게 일러준다. 수행자는 시종일관 답을 찾는데 혼신의 힘을 경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공안의 문제는 이미 제시되었는데,왜 답을 찾는 일을 하 지 않느냐?”이다. 예를 들면 “어째서 무라 했을까?” 혹은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뭣꼬?” 를 생각 생각에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공안, 즉 문제만을 자꾸 떠올리면서 되새김질하듯 이 의심하는 사구(死句)를 가지고는 참구가 지속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4) 방해를 넘어서 의정과 의단으로
일념이 만년 되도록 집중해서 답을 찾으려고 하다보면 정신적인 벽이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때 머리로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오직 온몸으로 그 벽을 향해 더욱 더 화두에 집중해서 부딪쳐가야 된다. 집중하면 할수록, 공부를 방해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방해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화두에만 집 중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만일 화두에 집중하지 않고 방해 받는 것을 없애고 공부 하려고 하면 방해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방해가 일어나든지 없어지든지 내버려두 고 화두에 집중하다보면 방해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참구 중에 눈앞에 밝은 빛이나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갑자기 전혀 알 수 없었던 공안이 이해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 경계이므로 학인은 경계를 가져 깨달음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병통도 옆에 선지식을 모시고 공부하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만일 혼자 수행하다가 이런 경계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 뵙고 점검을 받아야 한다.
답을 찾다가 활구의심이 익어지면 화두를 굳이 들려 하지 않아도 들려지고, 내려놓으려고 해도 놓아지지 않게 된다.이렇듯 화두의심이 회광반조(回光返照)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리 지 않아서 안과 밖이 그대로 화두와 더불어 한 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연 따 라 내면의 경계는 맑고 고요하더라도 화두 기운 따라서 목과 명치가 꽉 막혀 숨도 쉬기 어려울 지경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할 때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내야 한다. 이렇듯 온몸 이 타성일편(他成一片) 되어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되면, 곧 시절인연 따라서 안목이 열리게 된다고 했다.
고봉 화상은 이렇게 말했다.의심하고 의심하여 안과 밖이 한 조각이 되게 하여 온종일 털끝만치도 빈틈이 없어서 가슴에 뭉클한 것이 독약에 중독된 것과 같으며 또 금강덩어리[金剛圈]와 밤송이[栗棘蓬] 를 삼켜 꼭 내려가게 하려는 것과 같이하여 평생의 갖은 재주를 다 부려서 분연히 힘쓰면 자연히 깨칠 곳이 있을 것이다.
4. 대승불교의 꽃, 돈오
의단이 독로되어 안팎이 한 덩어리가 되면, 곧 시절인연 따라 마른하늘에 벼락 치듯, 매미 허물 벗듯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통쾌하고 시원하며 가벼운 것이 마치 나무통을 맨 테가 ‘팍’하고 터지는 것처럼 문득 의단을 타파하게 될 것이다.
몽산화상은 이렇게 말했다.의심들이 조여들면서 터질 즈음에 홀연히 댓돌 맞듯 맷돌 맞듯 계합하여 갑자기 ‘와!’하는 소리에 정안(正眼)이 열리고 밝아지면서 집에 이른 소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기연(機 緣)에 맞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화살촉을 맞추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차 별기연을 알아서 이전에 의심 때문에 막힌 것이 전부 다 얼음 녹듯이 흔적 없이 사라지면 서 법법마다 원통하여 당(堂)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로 작은 깨달음에 그치지 말라.(《몽산법어》, 안국선원, pp. 29~30)대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이 일단의 일을 알 수가 없어 그렇게 갑갑하던 마음이 순식간 에 텅 비게 된다. 온 몸과 마음이 새의 깃털보다 가볍고, 앞뒤가 탁 트인 것이 끝 간 데가 없이 시원하고, 평생 짊어지고 다니던 짐을 일거에 내려놓아 홀가분해진다.이와 같은 시절인연은 직접 체험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속히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가 점검받고, 뒷일을 부촉 받아야만 한다는 점을 명심해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5. 현재의 간화선풍에 대하여
간화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선학적인 근거가 필요하며 동시에 이 바탕 위에서 화두 의심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타파해야 한다. 간화선은 앉아있음만으로 선을 삼는 묵조선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제기되었음에도, 간화의 정신에 입각한 동정일여(動靜 一如)의 수행방법 보다는 단지 오래 앉아있는 것만으로 수행을 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묵조사선의 무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간화선이 만약 선정주의에 치우친다면 올바른 지견(知見)을 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혜쌍수의 수행전통에도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오랫동안 수행하신 큰스님께서 결제·해제 법문 때, 법문은 조사선의 입장으로 하면서 수행은 간화선으로 하라고 요구한다면 그 수행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법문을 듣는 수행자들에게 간화선에 대한 활발발하고 직접적인 방법을 제시해서 활구를 의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또한 간화선 대중화를 위한 화두참구를 지도할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눈 밝은 선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종단차원에서 간화선 수행만 전문으로 할 수 있는 특별한 수행공간을 마련하고 간화선 지도자 양성과 대중화를 위한 체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전문 연구원을 더 많이 키워내야 한다.
어떤 수행보다도 간화선 수행이 한국불교의 기복적이고 비불교적인 행위를 극복할 수 있는 미래불교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점을 명심해서, 간화선과 화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참의심을 불러일으켜 올바르게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장치해야 할 것이다.제방선원에서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이 안거하면서 수행을 하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은 간화선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 1백여 개의 선원에서는 매년 여름,겨울의 안거에 2 천2백여 명의 납자들이 화두(話頭)를 참구하며 정진하고 있으며, 그 외 전국의 시민 선원에서 정진하고 있는 간화선 수행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나 수만명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간화선 수행 열기를 가지고 있는 우리 조계종단의 수행체제가 보다 완벽하게 구비될 때, 한국불교 세계화의 실현 가능성도 한층 높아질 것이며, 전 세계인에게 간화선 수행을 통한 정신적 이익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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