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MS 로그인

중도에 대하여

중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움켜쥐지 않는 것,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태어나는 일마저도 바라지 않는다. 있음과 없음, 안과 밖, 선과 악, 참과 거짓을 가리는 그 어떠한 견해의 뒤도 좇지 않는다.사람이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 미혹한 삶이 시작된다.그러므로 후회할 일을 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예측하지도 않으며, 공정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깨달음을 향한 길을 걸어가는 자의 집착하지 않는 삶인 것이다.


깨달음에는 정해진 형체가 없기 때문에 깨닫는다는 것은 있지만 깨달아지는 것은 없다. 미혹이 있으므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미혹이 없어지면 깨달음도 없어진다. 미혹을 떠나서 깨달음은 없고 깨달음을 떠나서도 미혹은 없다.그러므로 깨달음을 붙잡으려고 하면 그것은 더 큰 걸림돌이 된다. 어둠이 있기에 비춤이 있고, 어둠이 없어지면 비춤도 없어진다. 비추는 것과 비추어지는 것이 다 같이 없어지는 것이다.


실로 도를 닦는 자는 깨달았으면서도 깨달음에 머물지 않는다. 깨달음에 집착한다는 것은 여전히 미혹하기 때문이다.이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은 미혹한 그대로 깨달음이요, 어두운 그대로 빛이다.


모든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이 될 때까지 완전하게 깨달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사물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보편적 합일 개념을 공(空)이라한다.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은 실체가 없고,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으며 어떤 이원성도 없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므로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모든 것은 서로 관계하여 이루어져 있고 서로 기대어서 존재하는 것으로 저 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사물에는 빛과 그림자, 길고 짧음, 검고 흰 것이 있는 것처럼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은 홀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라한다.또 미혹을 떠나서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을 떠나서 미혹이 없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거나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물에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있는것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사물이 생기는 것과 멸하는 것을 보고 있으나, 사물에는 본래 생긴다고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멸하는 일도 없다.사물의 이러한 진실한 모습을 보는 눈을 얻어서 사물에 생과 멸이 둘이 없음을 알고 다른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원래 ‘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것이 있을리 없다. 나와 내 것이 없음을 알아서 둘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깨끗함과 더러움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 둘에 집착한다.그러나 사물에는 원래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며 깨끗함이나 더러움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산과 악이 원래 별개의 것이라 생각하여 선악에 집착한다. 그러나 오직 선인 것도 없고 오직 악인 것도 없다. 깨달음의 길에 들어간 사람은 선과 악이 본래부터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알기 때문에 선을 칭찬하거나 악을 비난 하지 않으며, 선을 무시하거나 악을 용서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불행을 두려워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진실한 지혜를 가지고 이 두 가지를 살펴보면, 불행한 상태가 그대로 행복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불행이 그대로 행복이라고 깨달아야 한다. 지혜로운 자는 이렇게 변하는 상황을 합리적인 생각으로 맞아들여 성공해도 우쭐거리지 않고 실패해도 낙담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불이(不二)의 진리를 깨달은 자이다.그러므로 있음과 없음, 미혹과 깨달음, 진실함과 진실하지 않음, 순결과 불결, 바름과 그름이라고 말하는 것도 실은 상반된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모습에서는 말할 수도 보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와 같은 말이나 감정을 떠났을 때, 진실한 공(空)을 깨달을 수가 있다.이를테면 연꽃이 맑은 고원의 뭍에서는 피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러운 진흙 속에 피어나듯이, 미혹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잘못된 견해나 미혹에서 부처님의 씨앗이 생겨나는 것이다.


잠수부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야만 값을 따질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을 얻을 수가 있듯이, 미혹이라는 진흙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보물을 얻을 수가 없다.


산처럼 커다란 아집(我執)을 가진 자라야 비로소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이 일어나며 그러다 마침내 깨달음도 생길 것이다.그러므로 옛날에 선인(仙人)이 칼산에 올라도 다치지 않고, 자기 몸을 불 속에 던져도 불에 타기는커녕 상쾌함을 느꼈다고 하는 것처럼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명예와 이익과 탐욕의 칼산이나 증오의 불 속에서도 깨달음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반된 둘을 떠나서 그것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만약 상반된 둘 중 하나를 취하여 집착하면 설령 그것이 선하고 올바른 것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이 된다.


만약 사람이 모든 것은 변한다는 생각에 빠진다면 이것도 잘못된 생각에 빠지는 것이며, 또 만일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이것도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다. 나아가 사람이 내가 있다고 집착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영원히 괴로움을 떠날 수 없다 만약 내가 없다고 집착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며, 진리를 구하여도 소용이 없다.


또 모든 것은 오직 괴로움이라고 집착하여도 잘못된 생각이며, 모든 것은 다 즐거운 일이라고만 하여도 잘못된 생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원성이 단일성으로 융합하는 중도이고 이 두 가지 치우침에서 떠나 있다.





경전에서 말하는 중도에 대한 이해로부터 생겨난 통찰력은 습관의 힘을 부수고, 위대한 통찰과 사랑과 연민을 일으키는 에너지들을 만들어 낸다.


이런 에너지들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처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통찰력과 사랑을 미래 세대에게서도 전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중도란 무엇인가, 틱낫한)








중도 (소나경: Sona-sutta)


꼴리위사족 출신의 소나 존자는 출생할 때부터 집안이 매우 부유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초청으로 왕사성에 갔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로 출가한 소나는 왕사성 밖에 있는 공동묘지 근처의 수행처인 ‘차가운 숲’ 시따와나(sitavana)에서 그는 발에서 피가 날 정도로 남보다 엄격한 수행과 열심히 정진하였지만 욕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소나 존자는 오랜 수행에도 불구하고 취착을 없애지 못했고, 번뇌로부터 해탈하지 못한 것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으로 돌아가 재물을 즐기고, 보시 공덕이나 닦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으시고 소나 존자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거문고의 비유를 들어 중도(中道)의 수행법을 설해 주셨다.


"너는 수행이 어려워서 집으로 가려 하느냐?"


"그러하나이다."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전에 재가자였을 때 거문고의 활줄 소리에 능숙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문고의 활줄이 지나치게 팽팽한데도 그대의 거문고는 그때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하기에 적합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문고의 활줄이 지나치게 느슨한데도 그대의 거문고는 그때 선율이 이름답고 연주하기에 적합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그러나 그대의 거문고의 활줄이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고 적당한 음계에 맞추어졌을 때 그대의 거문고는 그때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하기에 적합하게 된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그와 같이 지나치게 열심인 정진은 들뜸으로 인도하고 지나치게 느슨한 정진은 나태함으로 인도한다. 소나여, 그러므로 그대는 정진을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다섯 가지] 기능들(五根)의균등함을 꿰뚫어야 하고 거기서 표상을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소나 존자는 세존께 웅답했다.


소나 존자는 그 뒤에 정진을 고르게 유지하였고, [다섯 가지] 기능들의 적당함을 꿰뚫었으며 거기서 표상을 취하였다. 그때 소나 존자는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력하며 지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소나경 (A6:55) Sona-sutta